등소평 자료 MR
- dpablan4077
- 2020년 12월 13일
- 1분 분량
등소평 자료
등소평
등소평에 대한 글입니다. 등소평의개혁개방사상11
1976년 1월 주은래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의 인민은 한없는 슬픔에 잠겼다. 광범한 군중은 여러 방법으로 애도를 표현했다. 사인방 일당은 군중의 추도활동을 극렬하게 저지하였다. 또한 우경명예회복풍조반격 운동을 계속 전개하여 정치·경제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기에 이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인민군중은 청명절(4월 4일)에 혁명선열을 추모하는 관습을 이용하여 3월말부터 자발적으로 천안문광장에 모여 주은래 총리에 대한 추도의 정을 표하고 사인방의 역류(逆流)를 통박하였다. 또한 지방 몇몇 지역에서도 이런 활동이 벌어진다.
청멸절인 4월 4일 북경 인민들의 추념활동이 고조되어 수십만 군중이 거듭된 중지명령을 무시하고 천안문광장으로 모여들어 사인방을 성토함으로써 혁명의 의분이 더욱 고양되었다. 이에 화국봉은 북경에 있는 일부 정치국위원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연일 계속되는 상황을 검토하였다. 이 회의에서 천안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것으로 보고 반혁명적 연설을 발표한 사람을 체포해야 한다는 거센 주장이 나온다. 다음 날인 4월 5일에도 광범한 군중이 계속 천안문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체포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군중들은 우리의 전우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민병, 경찰, 군인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런 혼란 속에서 노동자민병지휘부에 불이 붙어 군중, 민병, 경찰에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날 밤 곤봉으로 무장한 민병, 경찰, 군인이 투입되어 천안문사건이 진압되었다.
4월 6일 새벽 북경에 있던 정치국원 가운데 일부가 천안문사건을 보고 받고나서 민병을 계속해서 천안문광장에 대기토록 했다. 이러한 가운데 모택동은 천안문사건이 ‘반혁명 정치사건’으로 등소평 비판·우경명예회복풍조반격이란 대방향에 반하는 망상이란 보고를 받게 된다. 이에 근거하여 모택동은 등소평을 모든 직무를 박탈하되 당적은 남겨두어 이후의 경과를 보도록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문서정보]
문서분량 : 8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등소평
파일이름 : 등소평_2082186.hwp
키워드 : 등소평
자료No(pk) : 16148838
Comments